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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다 마사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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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쿠다 마사히로는 일본의 전 축구 선수로, 공격수로 활약했다. 사가미 공과대학 부속 고등학교와 주오 대학을 거쳐 1989년 미쓰비시 자동차에 입단하여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 우라와 레즈에서 2002년 은퇴할 때까지 한 팀에서만 뛰었다. 1995년에는 J1 리그 득점왕과 J리그 베스트 11에 선정되었으며, 1990년부터 1995년까지 일본 국가대표팀 선수로 45경기에 출전하여 9골을 기록했다. 은퇴 후에는 JFA 앰배서더로 활동하며 축구 보급에 기여했고, 축구 해설가로도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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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다 마사히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후쿠다 마사히로
본명후쿠다 마사히로
별칭후쿠
미스터 레즈
대장
가타카나 표기후쿠다 마사히로
로마자 표기FUKUDA Masahiro
출생일1966년 12월 27일
출생지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미도리구
176cm
몸무게68kg
포지션공격수
미드필더
주발오른발
클럽 경력
유소년 클럽 연도1982-1984
1985-1988
유소년 클럽사가미 공업대학 부속 고등학교
주오 대학
클럽 연도1989-2002
클럽미쓰비시/우라와 레즈
출장287
득점143
통산 출장287
통산 득점143
클럽 성적 갱신일2002년 12월 31일
국가대표 경력
국가대표팀일본
국가대표 연도1990-1995
국가대표 출장45
국가대표 득점9
대표팀 성적 갱신일1995년 10월 28일
지도자 경력
감독 연도해당사항 없음
감독팀해당사항 없음

2. 클럽 경력

사가미 공과대학 부속 고등학교와 주오 대학에서 선수로 활동한 후쿠다는 1989년 미쓰비시 자동차에 입단하여 당시 일본 사커 리그(JSL) 2부 리그 소속이던 팀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입단 첫 해에 36골을 기록하며 팀의 1부 리그 승격에 크게 기여했다.

1990년대 초 J1 리그가 출범하면서 미쓰비시 자동차 축구부는 우라와 레즈로 팀명을 바꾸고 프로 구단으로 전환했다. 후쿠다는 프로 선수로 전향하여 우라와 레즈에서 계속 뛰었다. 그는 1993년 6월 9일 가시마 사커 스타디움에서 열린 가시마 앤틀러스와의 경기에서 J1 리그 데뷔 골을 기록했다.

1995 시즌에는 32골을 기록하며 리그 득점왕에 올랐고, J리그 베스트 11에도 선정되었다. 그러나 1998 시즌, 우라와 레즈는 강등 위기에 처했다. 당시 J1 리그 규정상 강등을 피하기 위해서는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정규 시간 90분 안에 승리해야 했으나, 우라와는 이를 달성하지 못해 강등이 확정된 상태로 연장전에 돌입했다. 후쿠다는 이 연장전에서 골든 골을 넣었지만, 팀의 강등을 막지 못해 팬들은 이 골을 "세상에서 가장 슬픈 골든 골"로 기억한다.[1]

후쿠다는 2002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선수 생활 전체를 우라와 레즈 한 팀에서만 보낸 그는 팀의 상징적인 존재로 여겨졌으며, 팬들로부터 '미스터 레즈'(Mr. Reds|미스터 레즈eng)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2003년 초, 그의 은퇴 경기가 사이타마 스타디움에서 열렸고, 5만 명이 넘는 팬들이 경기장을 찾아 그의 마지막을 함께했다.

'''선수 경력'''

기간소속팀
1982년 ~ 1985년사가미 공업대학 부속 고등학교
1985년 ~ 1988년주오 대학
1989년 ~ 2002년미쓰비시 중공업/미쓰비시 자동차 / 우라와 레즈


2. 1. 유소년 시절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미도리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는 야구를 좋아했지만, 초등학교 5학년 때 요코하마시에서 후지사와시로 이사하면서 전학 간 초등학교에서 축구를 처음 접했다. 당시 담임 선생님의 매형이 요미우리 축구 클럽 코치였던 하시모토 아키야였는데, 후쿠다는 그에게 축구 기술을 배웠다[4]

중학교 진학 시, 하시모토 코치로부터 요미우리 클럽 Jr 유스 팀 입단을 권유받았으나[5], 이를 거절하고 지역의 오바 중학교로 진학했다. 2학년 때인 1981년에는 간토 예선을 통과해 전국 중학교 축구 대회에 출전했다. 가나가와현 내에서 이름이 알려진 선수였던 후쿠다는 고등학교 진학 시 처음에는 지역의 가나가와현립 후지사와니시 고등학교를 고려했지만, 전국 대회 출전 가능성이 더 높은 사가미공업대학 부속 고등학교로 진학을 결정했다[6]

사가미공업대학 부속 고등학교에서는 1학년 봄부터 주전 선수로 활약했고, 2학년 때는 간토 대회 4강 진출과 함께 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다. 하지만 전국 대회 출전은 끝내 이루지 못했다. 2학년 전국 고등학교 축구 선수권 대회 현 예선 결승에서는 가나가와현립 가마쿠라 고등학교에 패했고, 3학년 결승에서는 후지사와니시 고등학교에 패배했다. 고등학교 시절 가장 큰 주목을 받은 것은 3학년 때 참가한 국민 체육 대회였다. 가나가와현 선발팀의 센터 포워드로 출전하여 6골을 넣는 활약으로 팀의 결승 진출을 이끌었고, 결승전에서 시즈오카현 선발팀을 꺾고 팀의 첫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1985년에는 주오 대학 경제학부에 입학하여 축구부에 가입했다. 1학년 때부터 주전으로 뛰며 가을 간토 대학 축구 리그전에서 팀의 4위 달성에 기여하고 신인왕을 수상했다. 이러한 활약 덕분에 이전까지 연령별 대표팀에 선발된 경험이 없었던 후쿠다는 다음 해인 1986년 일본 B 대표로 발탁되어 남미 원정에 참가했다. 1987년에는 유니버시아드 대표 후보에 올랐으나 최종 명단에서는 탈락했고, 1988년에는 일본 B 대표로 아시안컵 대표팀 명단에 포함되었지만 경기 출전 기회는 얻지 못했다.

주오 대학 축구부에서는 3학년 리그전에서 어시스트왕을 차지했고, 4학년 때는 주장을 맡았다. 그러나 당시 축구부와 선수를 둘러싼 환경이 좋지 않아 축구에만 전념하기 어려웠던 점에 대해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후쿠다는 당시를 회상하며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는 의미 있었지만, 축구 선수로서는 마이너스인 시기였다"고 말했다[7]

대학 졸업 후 진로를 고민하던 중, 일본 축구 리그 소속 6개 팀으로부터 입단 제의를 받았고, 최종적으로 후루카와 전기공업 축구부와 미쓰비시 중공업 축구부 두 팀으로 선택지를 좁혔다. 1980년대 후반 일본 축구계에서는 프로 계약이 가능해지면서 대학 유망주들이 프로 지향적인 팀으로 가는 경향이 있었지만[8], 후쿠다는 대학 시절 성적을 고려했을 때 "축구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불확실하다고 판단하여 종신 고용을 선호했고, 아마추어 성향이 강했던 미쓰비시 중공업 입사를 결정했다。 또한, 미쓰비시가 직전 3년 연속 1부 리그 3위를 기록하며 1부 잔류가 유력해 보였고, 독일로 1개월 유학을 보내준다는 조건도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2. 2. 프로 데뷔와 우라와 레즈

주오 대학 졸업 후, 후쿠다는 일본 축구 리그(JSL) 소속 6개 팀으로부터 입단 제의를 받았다. 여러 팀을 고민한 끝에 후루카와 전기공업 축구부와 미쓰비시 중공업 축구부로 선택지를 좁혔다. 당시 일본 축구계는 프로 계약이 가능해지는 추세였고 유력 대학 선수들은 프로 지향 팀을 선호했지만[8], 후쿠다는 대학 시절 성적을 고려했을 때 축구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종신 고용을 희망했다. 결국 그는 아마추어 성향이 강했던 미쓰비시 중공업에 입사하기로 결정했다. 미쓰비시가 전년까지 JSL 1부에서 연속 3위를 기록하며 안정적인 전력을 갖췄다고 판단했고, 독일에서의 1개월 유학 조건을 제시한 것도 입단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1989년, 후쿠다는 당시 JSL 2부 리그에 속해 있던 미쓰비시 자동차에 입단하며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입단 첫 해에 36골을 기록하는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팀의 1부 리그 승격에 크게 기여했다.

1993년 J리그가 출범하면서 미쓰비시 자동차 축구부는 우라와 레즈로 팀명을 바꾸고 프로 구단으로 전환했다. 후쿠다는 프로 선수로 전향하여 우라와 레즈에서 계속 뛰게 되었다. 그는 1993년 6월 9일 가시마 사커 스타디움에서 열린 가시마 앤틀러스와의 경기에서 J1리그 데뷔 골을 기록했다. 당시 골키퍼를 제외한 우라와 선수 전원이 후쿠다에게 달려가 골을 축하했는데, 이 긴 세리머니 도중 주심이 경기 재개를 선언했고 상대 팀 가시마의 구로사키 히사시가 곧바로 동점 골을 넣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1995 시즌에는 32골을 터뜨리며 리그 득점왕에 올랐고, J리그 베스트 11에도 선정되는 등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하지만 1998 시즌, 우라와 레즈는 J2리그 강등 위기에 처했다. 강등을 피하기 위해서는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정규 시간 90분 안에 승리해야만 했다. 당시 J1리그는 정규 시간 무승부 시 골든 골 규칙이 적용된 연장전을 치렀고, 정규 시간 승리 시 승점 3점, 연장전 승리 시 승점 2점을 부여했다. 우라와는 정규 시간 내에 승리하지 못해 강등이 확정된 상태로 연장전에 돌입했다. 후쿠다는 이 연장전에서 골든 골을 넣었지만, 팀의 강등을 막지는 못했다. 팬들은 이 골을 "세상에서 가장 슬픈 골든 골"로 기억한다.[1]

후쿠다는 2002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선수 생활 전체를 우라와 레즈 한 팀에서만 보낸 그는 팀의 상징적인 존재로 여겨졌으며, 팬들로부터 '미스터 레즈'(Mr. Reds영어)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2003년 초, 그의 은퇴 경기가 사이타마 스타디움에서 열렸고, 5만 명이 넘는 팬들이 경기장을 찾아 그의 마지막을 함께했다.

2. 3. J리그 득점왕과 좌절

일본 사커 리그 2부 리그의 미쓰비시 자동차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한 후쿠다는 입단 첫 해인 1989년 36골을 기록하며 팀의 1부 리그 승격을 이끌었다.

1990년대 초 J1 리그 출범과 함께 미쓰비시가 우라와 레즈로 재창단되자, 후쿠다는 프로 선수로 전향하여 클럽에 남았다. 그는 1993년 6월 9일, 가시마 사커 스타디움에서 열린 가시마 앤틀러스와의 경기에서 J1 리그 데뷔 골을 기록했다. 당시 골키퍼를 제외한 모든 우라와 선수들이 후쿠다에게 몰려가 골을 축하했는데, 길어진 세리머니 동안 주심이 경기 재개를 선언했고, 이를 놓치지 않은 가시마의 구로사키 히사시가 곧바로 동점 골을 넣는 해프닝이 있었다.

1995 시즌, 후쿠다는 32골(이 중 14골은 PK 득점)을 기록하며 리그 득점왕에 올랐고, J리그 베스트 11에도 선정되었다. 당시 그의 플레이는 가시마에서 뛰던 지쿠로부터 "일본 최고의 선수"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22] 그는 부드러운 볼 터치와 빠른 스피드를 활용한 드리블 돌파로 기회를 만들고, 순간적인 움직임으로 수비 라인 뒷공간을 파고들어 직접 득점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일부에서는 미우라 가즈요시(카즈)보다 뛰어난 선수라는 평가도 있었다.[23] 양쪽 윙에서도 뛸 수 있어 "일본 최고의 윙 플레이어"라는 평가도 있었지만[24], 정작 본인은 중앙에서 더 강점을 발휘한다고 생각하여 기용 방식에 대해 감독과 의견 충돌을 빚기도 했다.[25]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서 방향 전환이나 드리블을 자주 시도하여 파울을 얻어내는 경우가 많았고, 이로 인해 PK 득점이 많아 'PK 장인'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의 리그 통산 PK 득점 26골은 엔도 야스히토에 이어 J1 리그 역대 2위 기록이다.

그러나 1998 시즌, 우라와 레즈는 강등 위기에 몰렸다. 당시 J1 리그는 정규 시간 승리에 승점 3점, 연장전 골든 골 승리에 승점 2점을 부여했는데, 강등을 피하기 위해서는 마지막 경기에서 반드시 정규 시간 내 승리가 필요했다. 하지만 우라와는 90분 안에 승리하지 못했고, 선수들은 이미 강등이 확정된 상태에서 연장전에 돌입해야 했다. 이 연장전에서 후쿠다는 골든 골을 넣었지만, 팀의 강등을 막지 못한 이 골은 팬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슬픈 골든 골"로 기억되고 있다.[1]

후쿠다는 2002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선수 생활 내내 우라와 레즈 한 팀에서만 뛴 그는 팀의 상징적인 존재로 여겨지며 팬들로부터 "미스터 레즈"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2003년 초 사이타마 스타디움에서 열린 그의 은퇴 경기에는 5만 명이 넘는 팬들이 찾아와 작별을 고했다.

2. 4. 은퇴

2002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시즌 2nd 스테이지 나고야 그램퍼스 에이트전에서 넣은 골이 리그전 마지막 득점이 되었다. 이 경기에서 우라와는 2-1로 승리했고, 경기 후 히어로 인터뷰를 한 후쿠다는 "질 수 없어(負けられません)"라고 해야 할 부분을 "질 수 없어(負けれません)"라고 잘못 말해, 경기장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 경기에서 선두를 차지한 우라와는 이후 리그전에서 전패하여 우승 경쟁에서 탈락했고, 결승까지 진출했던 나비스코컵에서도 가시마 앤틀러스에게 패했으며, 천황배도 첫 경기에서 탈락했다. 후쿠다 은퇴 후 2003년까지 이어지는 공식전 11연패(리그 7전 + 나비스코컵 3전 + 천황배 1전, 무승부 없음), 12경기 무승(그 기간 약 6개월)을 기록했다.

은퇴 기자회견에서는 현역 시절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으로 1999년 시즌 최종전 산프레체 히로시마와의 경기에서 기록한 V골을 꼽았다[27]. 이 경기에서 후쿠다는 후반 교체 출전하여 연장전에서 V골을 넣었지만,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고, 이케다 마나부가 V골을 기뻐하며 껴안아도 뿌리치는 모습이 TV 중계로 방송되었다. 후쿠다를 포함한 우라와 선수들은 연장전에 들어갈 시점에서 우라와의 J1 잔류 가능성이 사라진 것을 알고 플레이를 계속했다. 이케다 마나부 본인은 루키였던 자신이 팀의 J2 강등을 알지 못했다고 밝혔으나, 후쿠다는 훗날 "몰랐던 건 이케다뿐. 이 경기가 뭔지 모르는 선수가 피치에 서 있었다는 게, 이때 (레즈의) 수준이었다"고 회고했다. 이 골은 오늘날에도 '세계에서 가장 슬픈 V골'이라고 불리며, 후쿠다 자신도 이 골을 "눈물의 V골"이라고 말했다.

후쿠다의 등번호 9번은 나가이 유이치로가 물려받았다. 그러나 "'등번호 9'에 덧씌워진 '골 게터', '팀의 상징'이라는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처음에는 공격수 선수들이 '9번'을 물려받는 것을 망설였다고 한다.

은퇴 후에도 우라와 서포터들 사이에서 뿌리 깊은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일부에서는 "장래에 우라와 감독이 되라"는 목소리도 있다. 후쿠다 자신도 장래에 우라와 감독이 되기를 희망하고 있으며, 2007년 6월 J리그 클럽 감독이 되는 데 필요한 S급 라이센스를 취득했다. 다만, 후쿠다 본인으로부터 감독 취임을 희망한다는 발언은 없었다(팀 및 현 감독에게 실례가 된다고 본인이 생각하기 때문)[28]. 2004년 우라와가 시즌 2nd 스테이지에서 우승했을 때, 텔레비 사이타마 해설자로서 중계석에 있던 후쿠다를 향해 경기장의 우라와 서포터들이 "GET GOAL FUKUDA!!" (현역 시절 후쿠다 응원가) 콜을 외치기도 했다. 현재는 우라와의 메인 스폰서이기도 한 도신 파트너스의 이미지 캐릭터도 맡고 있다.

3. 국가대표 경력

후쿠다는 1990년부터 1995년까지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하며 A매치 45경기에 출전해 9골을 기록했다.[2]

구분날짜상대팀장소비고
대표팀 첫 출장1990년 7월 27일대한민국베이징다이너스티컵
대표팀 첫 득점1992년 8월 24일중국베이징다이너스티컵



그는 일본에서 열린 1992년 AFC 아시안컵에 참가하여 일본의 우승에 기여했다. 이 대회에서 4경기에 출전했으며, 중국과의 준결승전에서 득점을 기록했다.

또한 1994년 FIFA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에도 참가했으나, 일본은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이라크와의 최종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경기 종료 직전 동점골을 허용하며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이 사건은 훗날 도하의 비극으로 불리게 된다.

3. 1. 1994년 FIFA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 '도하의 비극'

한스 오프트 감독이 이끌던 일본 대표팀은 1994년 FIFA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을 통과하여 사상 첫 월드컵 본선 진출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후쿠다 역시 대표팀의 일원으로 예선에 참가했다.

그러나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이라크와의 최종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일본의 희망은 꺾였다. 후쿠다는 이 경기에 하세가와 겐타와 교체되어 후반 14분(59분)에 투입되어 경기 종료까지 뛰었다.[2] 일본은 경기 종료 직전까지 리드를 지켰으나, 후반 추가시간에 이라크에게 통한의 동점골을 허용하며 다 잡았던 본선 진출권을 놓치고 말았다. 이 극적인 경기는 일본 축구 팬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고, 이후 도하의 비극으로 불리게 되었다.

4. 은퇴 후 활동

은퇴 후 다양한 방송 프로그램과 잡지에서 축구 해설가 및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2007년에는 J리그 클럽 감독 자격에 필요한 JFA 공인 S급 코치 라이선스를 취득했다.[28]

지도자 및 관련 활동 경력은 다음과 같다.

기간소속/직책비고
2003년 ~ 2007년우라와 레드 다이아몬즈 하트풀 클럽 코치
2003년일본 축구 협회 앰배서더
2008년 ~ 2010년우라와 레즈 코치2010년 사임



현재도 우라와 서포터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으며, 일부에서는 장래에 우라와 감독이 되기를 바라는 목소리도 있다. 후쿠다 본인도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장래 우라와 감독직을 희망한다고 밝혔으나[28], 실제 감독 취임 희망 발언은 팀과 현 감독에게 실례가 될 수 있다는 판단 하에 하지 않고 있다.[28]

2004년 우라와가 J리그 세컨드 스테이지에서 우승했을 때, 텔레비 사이타마 해설자로 중계석에 있던 후쿠다를 향해 경기장의 우라와 서포터들이 현역 시절 응원가인 "GET GOAL FUKUDA!!"를 외치기도 했다. 또한, 현재 우라와의 메인 스폰서 중 하나인 도신 파트너스의 이미지 캐릭터도 맡고 있다.

5. 플레이 스타일

부드러운 볼 터치와 스피드를 활용한 드리블 돌파로 기회를 만드는 플레이에 능했다. 순간적인 속도를 살려 수비 라인 뒤로 침투하여 직접 득점하는 능력도 갖추었다. 20대 후반 시절, 가시마에서 뛰던 지쿠는 그를 "일본 최고의 선수"라고 평가했으며[22], '도하의 비극' 당시 일본 대표팀 동료였던 미우라 가즈요시보다 뛰어나다는 평가도 있었다[23]

스피드를 활용한 드리블 돌파 능력 덕분에 좌우 양쪽 윙(또는 사이드 하프)에서 활약할 수 있어 "일본 최고의 윙 플레이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24], 후쿠다 자신은 중앙에서 더 강점을 보인다고 생각했고, 이 때문에 기용 방식을 두고 감독이나 코칭 스태프와 의견 충돌을 빚기도 했다고 전해진다[25]

현역 시절 많은 득점을 PK로 기록하여 "'PK 장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J1리그 통산 PK 득점은 26골로, 이는 엔도 야스히토에 이어 역대 2위에 해당한다. 1995년 J리그 최초의 일본인 득점왕이 되었을 때 기록한 32골 중 14골이 PK였다.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서 방향 전환이나 드리블을 자주 시도했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 파울을 유도하여 얻어낸 PK도 많았다.

6. 에피소드

부드러운 볼 터치와 스피드를 활용한 드리블 돌파로 찬스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뛰어났다. 순간적인 스피드를 이용하여 수비 라인 뒤쪽으로 침투해 직접 득점을 올릴 수도 있었다. 20대 후반 시절 그의 플레이는 가시마에서 뛰던 지쿠로부터 "일본 최고의 선수"라는 찬사를 받았으며[22], '도하의 비극'을 겪었던 세대의 일본 대표팀 선수들 중에서는 미우라 가즈요시(카즈)보다 더 뛰어난 실력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23]

특유의 스피드를 살린 드리블 돌파 능력 덕분에 좌우 양쪽 윙(또는 사이드 하프) 포지션에서 활약할 수 있어 "일본 최고의 윙 플레이어"라는 평가도 있었다[24]。 하지만 후쿠다 본인은 측면보다는 중앙에서 자신의 강점이 더 잘 발휘된다고 생각했으며, 이 때문에 자신의 기용 방식을 두고 감독이나 코칭 스태프와 의견 충돌을 빚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25]

현역 시절, 많은 득점을 PK로 기록하여 "'PK 장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리그 통산 PK 득점 26골은 엔도 야스히토에 이어 J1 역대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1995년 J리그에서 일본인 선수 최초로 득점왕에 올랐을 때도, 기록한 32골 중 14골이 PK였다.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서 방향 전환이나 드리블을 자주 시도했기 때문에, 스스로 파울을 얻어내 PK를 만드는 경우도 많았다.

7. 개인 수상


  • JSL 2부 득점왕: 1회 (1989-90)
  • J1리그 득점왕: 1회 (1995)
  • J리그 베스트 일레븐: 1회 (1995)
  • 아시아 축구 연맹(AFC) 월간 최우수 선수: 1회 (1995년 11월)
  • J리그 공로 선수상: 1회 (2003)

8. 통산 기록

(내용 없음)

8. 1. 클럽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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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기록리그리그 컵합계
시즌클럽리그출장출장출장출장
일본리그천황배 전일본 축구 선수권 대회J.리그컵합계
1989/90미쓰비시 자동차JSL 디비전 2263600102736
1990/91JSL 디비전 11872000207
1991/921573200189
1992우라와 레즈J1 리그-4294136
19932742300297
19942563200288
1995503232-5334
1996430074117
1997292100843725
199817734002011
1999231321402914
2000J2 리그1220000122
2001J1 리그1424030212
20022731091374
합계28714327164113355172


8. 2. 국가대표팀 기록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연도출장득점
199050
199120
199283
1993153
199400
1995153
합계459

[2]


  • 일본 대표팀 첫 출장: 1990년 7월 27일 대 대한민국전 (베이징)
  • 일본 대표팀 첫 득점: 1992년 8월 24일 대 중국전 (베이징)


#연월일개최지대전 국가스코어결과경기 개요
11992년 8월 24일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중국2-0승리1992년 다이너스티컵
21992년 8월 26일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4-1승리1992년 다이너스티컵
31992년 11월 6일일본, 히로시마중국3-2승리1992년 AFC 아시안컵
41993년 4월 11일일본, 도쿄방글라데시8-0승리1994년 FIFA 월드컵 예선
5
61993년 4월 30일아랍에미리트, 두바이방글라데시4-1승리1994년 FIFA 월드컵 예선
71995년 2월 26일홍콩대한민국2-2
(PK 5-3)
무승부1995년 다이너스티컵
81995년 8월 6일일본, 교토3-0승리친선 경기
91995년 8월 9일일본, 도쿄브라질1-5패배친선 경기


참조

[1] 웹사이트 世界で一番悲しいVゴール https://www.homemate[...] 2023-12-04
[2] 웹사이트 Japan National Football Team Database http://www.jfootball[...]
[3] 서적 J.LEAGUE OFFICIAL FANS' GUIDE 2002
[4] 서적 ミスターレッズ福田正博
[5] 서적 ミスターレッズ福田正博
[6] 서적 ミスターレッズ福田正博
[7] 서적 ミスターレッズ福田正博
[8] 서적 ミスターレッズ福田正博
[9] 서적 ミスターレッズ福田正博
[10] 서적 ミスターレッズ福田正博
[11] 서적 ミスターレッズ福田正博
[12] 서적 ミスターレッズ福田正博
[13] 서적 ミスターレッズ福田正博
[14] 서적 ミスターレッズ福田正博
[15] 웹사이트 "「ちょっと病みつきになる」福田正博が惚れた最高のパサーはラモスでも小野でもなく…森保に慰められたJ2降格、引退を決めたオフトの言葉" https://number.bunsh[...] 2024-04-24
[16] 웹사이트 浦和の命運がかかる大一番で下された、エース・福田正博への非情采配 3 https://sportiva.shu[...] 2018-01-18
[17] 웹사이트 浦和の命運がかかる大一番で下された、エース・福田正博への非情采配 https://sportiva.shu[...] 2018-01-18
[18] 웹사이트 証言・福田正博。あの「何の意味もないVゴール」に至る屈辱のシーズン https://sportiva.shu[...] 2018-01-18
[19] 간행물 J LEAGUE NEWS VOL.94 http://www.j-league.[...]
[20] 웹사이트 福田正博氏がトップチームコーチに就任 http://www.urawa-red[...] 浦和レッドダイヤモンズ公式サイト
[21] 웹사이트 フィンケ監督との契約について http://www.urawa-red[...] 浦和レッドダイヤモンズ公式サイト
[22] 서적 RED DIAMONDS OFFICIAL HANDBOOK 1994
[23] 서적 Jリーグ最強読本
[24] 서적 Jリーグ最強読本
[25] 서적 ミスターレッズ福田正博
[26] 뉴스 この人と飲みたい(第2、4木曜日) : 福田正博(サッカー解説者)<後編>「いつか監督として再びピッチへ」 http://www.ninomiyas[...] スポーツコミュニケーションズ 2013-05-23
[27] 서적 ミスターレッズ福田正博
[28] 웹사이트 ♯31 元サッカー日本代表 福田正博×ドイツ フランクフルト編 https://archives.bs-[...] BS朝日
[29] 웹사이트 じゅんいちダビッドソン、「白猫プロジェクト」CMで前園を励ます https://natalie.mu/o[...] 나탈리 (뉴스사이트) 2015-07-26
[30] 문서
[31] 문서
[32] 문서
[33] 문서
[34] 문서
[35] 문서
[36] 방송 報道ステーション SUNDAY
[37] 방송 ミュージックステーション 2013-09
[38] 방송 報道ステーション SUNDAY 2015-03
[39] 기타 캐스터 대리
[40] 기타 메인 캐스터 대리
[41] 방송
[42] 방송
[43] 방송 サンデーステーショ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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